평양시대

평양시대

1903년, 한국 역사의 여명기에 미국 북장로교 선교사 마포삼열 목사가 교육과 선교를 목적으로 43명의 학생을 모아 근대 서구식 교육을 시작함으로써 숭의의 역사는 시작되었다.

숭의여자대학교 SOONGEUI WOMENS'S COLLEGE

여성교육의 여명(1800년대)

우리나라 여성들은 부권제(부권제), 부계제(부계제) 가족으로서 가부장권이 철저히 확립되어 있는 부계혈통을 중심으로 한 대가족제도하에서 순종과 인내를 강요당하며 살아왔다. 이런 이류로 여성들은 가사 노동이 중심이었고 사회활동, 경제활동 등에서는 배제되었다. 그러나 조선 말 쇄국 정치가 무너지고 서양 여러 나라와 통상이 이루어지며 기독교가 전파되면서 여성들의 자각이 싹트기 시작하였고, 외국선교부에서 여성 교육기관 설립에 적극적이어서 숭의여학교가 평양에서 개교할 수 있는 계기가 마련되었다.

교육 선교 정책(1884)

1884년 7월에 맥클레이(R. S Maclay)에게 허락한 고종의 선교 윤허는 학교와 병원 사업에 국한되었다. 의료선교는 1885년 알렌(H.A.Allen)에 의해 광혜원(곧 제중원으로 명칭 변경)이란 병원이 세워졌고, 학교선교는 언더우드(John Underwood), 아펜젤러(Henry G. Appenzeller), 스크랜튼 등에 의해 서울에서 남·녀 학교가 세워지고 지방에도 선교부 또는 지방 교인들이 세운 기독교 학교가 늘어났다. 기독교의 의료, 교육 선교 정책이 뿌리를 뻗어 사회에 새로운 풍조를 일으키자 여성 교육의 필요성이 고조되면서 그 요구에 발맞추어 여성 교육의 전당인 숭의여학교가 설립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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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교 소학교 시절(1897년)

1897년 여성교육의 깃발을 들고 평양에 하나님의 진리와 신문학을 가르치는 새 교육기관인 '예수교소학교'가 설립되었다. 학제는 6년과정이었다. 1903년 제1회 졸업생 3명, 김애희, 김유선, 김경희가 배출되었다. 세 졸업생은 뒷날 모두 숭의여학교에 진학한 후 숭의여학교 제 1회 졸업생이 되었다.

설립자 마포삼열 목사

"숭의"의 설립자인 마포삼열 목사는 하나님 나라를 건설하기 위해 무수한 위기와 수난을 겪으면서도 불굴의 의지로 "한국인의 복음화"를 위해 헌신한 분이다. 마포삼열 목사는 치밀한 계획과 정확한 상황 판단으로 일을 추진했으며 친화력이 뛰어난 인물로서, 신도들과 함께 기도하는 종, 말씀으로 어린 양들을 양육하는 종, 헌신과 봉사의 종이었고 겸손하면서도 뜨거운 열정을 가진 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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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최초의 여학교, 숭의여학교 탄생(1903)

예수교소학교를 나온 세 명 졸업생들의 진학을 위해 중등교육을 실시하자는 마포삼열목사의 계획을 선교부에서 받아들여 1903년 10월 31일 숭의가 문을 열었다. 숭의는 '의를 높이고 숭상한다'는 정신을 바탕으로 지식을 가르치는 일보다는 그리스도의 사랑, 봉사 실현에 더욱 힘썼으며, 그리스도의 정신에 입각하여 완숙한 인간성을 형성하는 것, 그러한 건학 정신으로 계속 살아 움직였다.

항일운동 / 여성결사대 '송죽회'

1910년 한일강제병합 후 일제가 식민지 정책을 본격적으로 펴 나가자 평양 숭의여학교 졸업생과 재학생이 주축이 된 항일 여성비밀결사조직인 송죽회(松竹會)가 결성되었다.

1913년 숭의여학교 졸업생으로 숭의여학교 교사를 거쳐 숭현여학교 교사로 재직하던 김경희(金敬喜), 숭의여학교 교사인 황에스터(黃愛德), 이효덕(李孝德), 졸업생 안정석(安貞錫),재학생 박현숙(朴賢淑), 황신덕(黃信德), 채광덕(蔡光德), 이마대(李馬大), 송복신(宋福信), 김옥석(金玉石), 최자혜(崔慈惠),서매물(徐梅勿)등이 송죽결사대를 조직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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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운동과 숭의여학생들의 태극기

숭의의 교사들은 수업과정에서 애국, 애족사상을 은밀히 주입시켰다. 명성황후 시해 사건과 1919년 고종의 붕어는 일본에 대한 적개심을 불타오르게 하는 계기가 되었고, 숭의여학교 교사들과 송죽결사대를 중심으로 한 학생들은 이 절호의 기회를 포착하여 거사할 계획을 수립하였다.

숭의의 교사와 학생들은 독자적인 만세 운동을 펼치기 위해 3일 밤낮으로 태극기 200여개를 제작하였다.

1919년 3월 1일 평양 남산현교회에서 서울보다 1시간가량 앞선 오후 1시 경에 식이 시작되었고, 길선주 목사의 독립선언서가 낭독되고, 곽권웅 목사가 "대한독립만세"를 선창하니 장내가 터질 것 같은 만세소리가 치솟았다. 그리고 그 군중들의 손에는 숭의여학생들이 지하실과 기숙사, 개인집 안방에서 눈을 비벼가며 만든 자랑스러운 태극기가 펄럭이고 있었다.


평양에서의 마지막 졸업, 그리고 폐교식

1937년 10월 29일, 가시밭길을 걸어 35년 5개월 동안 시종일관 불의와는 타협하지 않고 이 땅의 여명기에 많은 여성 인재를 길러 새 역사 창조에 크게 기여한 명문 여학교 숭의가 신사참배라는 부당한 강요에 맞서 싸우다 마침내 스스로 그 문을 닫게 되었다.

1938년 3월 11일 마지막 졸업식이 숭의강당에서 거행되었다. 소안엽 교장은 고별사를 하였으며 수료증을 받던 학생들은 통곡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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