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안내

  • 마포삼열
    마포삼열

    마포삼열

    한국교회의 아버지, 마포삼열(Samuel Austin Moffet, 1864~1939) 박사

    1890년 1월 25일 그의 26세 생일날 아침, 제물포에 내려 5년간 11회의 전도여행을 통해 미지의 조선에 오직 말씀을 전하여 그들의 영혼을 살려야 한다는 사명감과 열정으로 1893년 평양에 선교부를 설치하고, 1899년 평양에 장대현교회를 설립하였으며 평양대부흥운동으로 시작해서 은퇴할 때까지 46년 동안 북한 전역에 1,000여 개 교회를 개척하고 초기 한국 교회 지도자를 양성한 한국 교회의 아버지였다.

    그는 백여 년 전 암울했던 미개한 나라에 오직 복음 하나로 자신의 삶 전체를 던져 고난 속에 있는 우리 민족을 깨우며 하나님의 일꾼으로서 살았다.

    1901년 평양신학교(대한 예수교 장로회)를 시작으로 수많은 교회와 학교를 설립하여 교역자와 여성 지도자를 길러내고, 우리 민족이 겪는 고통을 위로하며 선교하다가 건강을 잃어 1936년 9월 24일 본국으로 돌아가서 한국을 그리워하다 1939년 10월 24일 75세로 별세하였다.

    오늘날 이 땅에 수많은 교회가 있고 주님의 뜻을 따르는 영적 지도자들이 이 나라와 세계복음화에 헌신하는 것은 한국 기독교 초기, 마펫 목사의 귀한 희생이 있었기 때문이다.

  • 박현숙
    박현숙

    박현숙

    숭의 재건의 어머니, 박현숙(朴賢淑, 1896~1980)

    청해(靑海) 박현숙 선생은 평양 숭의여학교 제6회 졸업생이며 모교의 교사로서 해방 후 서울에서 숭의를 재건한 주역이었으며 숭의가 낳은 독립투사이며, 민족의 지도자였다.

    그는 17세 되던 해인 1913년 학생 신분으로 항일 비밀여성단체인 송죽결사대 창단 회원으로 참여하여 독립운동에 앞장섰으며, 제3대 회장을 역임하면서 망명 지사의 가족을 돕고 독립군의 자금을 모금·지원하는 등 적극적인 활동을 전개하였다.

    1919년 3·1 운동 때에는 평양에서 여성만세운동을 주도하다가 세 차례나 옥고를 치렀다.

    또한, 해방 후에는 일제의 신사참배 강요에 맞서 자진 폐교한 모교 숭의를 서울에 재건하는 일에 산파역을 맡아 1953년 설립인가를 받고, 설립자 겸 이사장으로 취임하여 고난과 역경을 딛고 숭의 재건의 초석을 놓았다.

    1952년 무임소장관을 비롯하여 대한부인회 부총재, 1953년 자유당 최고위원, 1958년과 1963년 2차례의 국회의원, 1959년 전국여성단체연합회 최고위원, 1964년 국회 조찬기도회, 1966년 대통령 조찬기도회를 창설하여 회장을 맡았다. 

    그리고 서울과 지역구인 김화 두 곳에 교회를 세워 전도 사업에도 앞장섰다.

    1969년에는 3·1 여성동지회 회장 등 중책을 맡아 국가와 민족을 위하여 크게 헌신하여 1980년 건국표창, 1990년에는 건국훈장을 받았다.

    1980년 12월 31일 운명하시어, 대전 현충원 제1애국지사 묘역에 안장되었다.

  • 김옥길
    김옥길

    김옥길

    교육계의 큰 스승, 김옥길(金玉吉, 1921~1990)

    1938년 평양 숭의여학교가 자진 폐교할 때 4학년이었던 김옥길 선생은 여성 최초 문교부장관으로 재직하며 학원 자율화와 교복자율화를 추진하는 등 한국 민주교육 발전에 큰 발자취를 남겼다. 

    “나는 숭의여학교 시절에 하나님과 조국을 섬기는 법을 배웠으며 그 실천을 위해 평생을 다했다”고 말해 숭의교육이 삶의 철학이 된 것을 보여주었다. 

    2009년 동생인 김동길 박사로부터 김옥길 선생의 손때가 묻은 소중한 유품들을 기증받아 이 곳에 ‘김옥길기념실’을 개관하였다.


    1921   평안남도 맹산군 원남면 향평리 110에서 출생

    1938  숭의여학교 자진 폐교 때 4학년으로 졸업

    1943  이화여자전문학교 문과 졸업

    1952  미국 오하이오 웨슬리안대학교 졸업

    1952 – 1961  이화여자대학교 교수

    1957 – 1958  미국 템플대학교 대학원 수학

    1961   이화여자대학교 명예문학박사

    1961 – 1979   이화여자대학교 총장

    1979   국제연합한국위원회 위원장

    1979 – 1990   이화여자대학교 명예총장

    1979.12 – 1980.5  여성 최초 문교부 장관

    1982   인촌문화상 수상

    1986.12 – 1990.8  학교법인 이화학당 이사장

    1987 – 1990   재단법인 우월 김활란장학회 이사장

    1988 – 1990   대한적십자사 중앙위원

    1990   국민훈장 무궁화장, 적십자사 인도상 금장 등 수상

  • 홍종명
    홍종명

    홍종명

    향토적이며 신앙적인 요소를 한 폭의 그림으로 승화시킨 예술가, 홍종명(洪鍾鳴, 1922~2004)

    홍종명 화백은 1973년 본 대학에 첫발을 내디딘 후 숭의에서 15년, 교직에서만 40여 년 제자 키우는 일에 전념하여 재직 중 2차례에 걸쳐 학장과 명예학장으로 지내고 1987년 정년을 맞아 퇴임하였다.

    그는 1922년 5월 20일 평양 신양리에서 독실한 기독교 가정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아버지 홍재연(洪在衍)은 숭실전문 출신으로 정진(正進)학교 교감이며 장로로서 집안이 이미 4대째 장로였다.

    열네 살 때 회진하던 의사의 한마디 칭찬이 화가로서의 인생을 걷게 하였고, 체험으로 터득한 교육 철학을 숭의학원에 적용시켜 수많은 제자를 길러낸 존경받는 스승이었다.

    조부와 부친이 기독교 장로였던 만큼 그는 철저한 기독교적 예술가였다. 그의 유화세계는 모두 ‘주님께 바치는 마음의 표현’으로 구현되었다. ‘예수그리스도’가 주제가 아닌 자유로운 여러 소재의 화면들에서도 회화적 감정은 기도하는 마음으로 표현되었다. 종교적 신앙심으로 세계를 보고 표현하려고 한 화가 홍종명, 숭의인물관 ‘홍종명갤러리’에 전시되어 있는 작품들은

    그가 2001년 숭의에 기증한 작품들이다.


    주요경력사항

    한국 기독교 미술인협회 회장 역임

    국전 초대작가, 국전심사위원 역임

    문화예술진흥원 자문위원 및 심의위원장 역임

    대한민국미술대전 운영위원 역임

    숭의여자대학 학장 역임

    한국미술협회 고문 역임

    아세아기독교미술인협회 한국대표로 참가(5회)


    수상

    국전 문교부장관상(2회)

    국전 특선(6회)

    국전 추천작가상, 예술원 회장상(1974, 문교부)

    교육공로상(1978, 서울시)

    국민훈장 목련상(1989, 대한민국 국가보훈회)

    예술문화상 공로상(1988)

    대한민국 기독교 미술상(1990, 기독교미술인협회)

    대한민국 은관문화훈장(1994)

  • 이신덕
    이신덕

    이신덕

    숭의 재건의 밀알, 이신덕(李信德, 1911~1994)

    숭의여자중·고등학교 제7대 이신덕 교장은 일제의 신사참배 거부로 폐교된 모교를 박현숙 선생과 함께 서울에 재건한 주역이다.

    선생은 평양에서 숭의여학교(19회)와 보육과(3회)를 합하여 7년간(1924~1931) 숭의의 딸로 자랐다. 평양 만세운동 당시에는 학생회장을 맡아 태극기를 만들고 거사에 참여하여 감옥살이를 치러야 했던 항일투사였다. 

    졸업 후 춘산 유치원 교사, 월남하여 서울대학교 법학과를 졸업한 후 세브란스 간호고등학교 교사와 사감을 역임하였고, 1946년 4월 서울에서 숭의재건위원회를 발족하여 동문들과 함께 숭의 재건에 심혈을 기울였다. 

    1953년 5월, 숭의여자중·고등학교의 설립인가를 받고 교장으로 취임한 선생은 퇴계로 송죽원 건물을 임시교사로 하여 학생을 모집해 가르치면서, 일제의 경성신사 자리를 인수하여 학교의 터를 잡고, 천막교사로 출발하여 맨주먹으로 어엿한 건물을 준공할 때까지 그 수많은 시련의 과정을 오직 신앙과 열정으로 극복하였다.

    선생은 숭의여자중·고등학교 외에도 1964년 숭의보육학교(현 숭의여자대학교), 1966년 숭의초등학교를 설립하여 초대 교장을 역임하였고, 1974 숭의유치원을 설립함으로써 숭의를 거대한 캠퍼스로 완성하였다. 

    1974년 학교를 떠날 때까지, 선생은 평생 독신으로 숭의의 재건과 발전을 위하여 썩어지는 밀알이 되어 살았다. 

    실로 우러러 존경받을 만한 숭의의 어머니요 진정한 교육자였다.

    이러한 공로가 인정되어 1971년 정부는 선생에게 국민훈장 동백장을 수여하였다.

  • 권기옥
    권기옥

    권기옥

    독립을 염원했던 최초의 여류 비행사, 권기옥(權基玉, 1901~1988)

    숭의여학교 11회 졸업생인 권기옥은 대한민국의 독립운동가이며, 한국 최초의 여자 비행사였다. 그는 재학 중 숭의여학교 교사로 근무하던 박현숙의 영향을 받아 항일 비밀결사인 송죽회에 참가해 태극기 그리기, 군자금을 모금하는 활동을 벌였다. 재학 중 박현숙을 통해 민족대표 33인 중 한 명이었던 신홍식(申洪植)의 지휘를 받아 평양에서 3·1 만세시위를 일으키는 데 동참했다가 잠시 구금되었다.

    이후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군자금을 모금하는 일에 참가했다가 다시 체포되어 6개월간 옥고를 치렀다. 출소한 후 브라스밴드단을 만들어서 평안도와 경상도 지방을 순회하며 민중계몽운동과 독립운동의 연락 활동을 하며 폭탄을 운반하는 일을 도왔다. 이후 상하이로 밀항하여 비행사가 되겠다는 포부를 안고, 임시정부의 추천으로 1924년 윈난육군항공학교에 입학, 제1기생으로 졸업하여 여성으로서는 한국 최초의 비행사가 되었다. 

    1926년 북경의 항공대에 들어간 그는 1927년 국민혁명군이 공군을 창설하자 상하이로 가서 중국 공군 비행원으로 임명받았다. 1928년 난징(南京)에서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옥고를 치렀고, 내몽골로 피난하게 되었을 때 이상정(李相定)을 만나 결혼하였다. 

    중국 공군에서 소령, 중령에까지 올랐다가 대한독립군 대령에까지 이르렀다. 1932년 일본이 상하이 전투에 활약한 공로로 무공훈장을 받았다.

    중일전쟁 후에는 충친의 육군참모학교 교관으로 활약하였고, 1939년 임시정부가 충칭으로 옮기자 권기옥은 임시정부 산하의 여성 조직인 대한애국부인회를 재건하고 임국영(林國英)이라는 가명으로 활동하였다.

    광복 후 귀국한 그는 국회 국방위원회 전문위원이 되어 한국 공군 창설의 산파 역할을 했고, 올바른 역사기록에 대한 신념으로 《한국연감》을 발행하여 대한민국 최초의 유일한 여성 출판인이 되었다. 

    10년간 한중문화협회 부회장을 역임하였고, 1968년 대통령 표창, 1977년 대한민국 건국훈장 국민장을 받았다. 1988년 사망하여 국립묘지 애국지사 묘역에 안장되었으며 2003년 8월 국가보훈처 ‘8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되었다. 

  • 김경희
    김경희

    김경희

    애국의 횃불, 김경희 (金敬喜, 1889-1920)

    평양 숭의여학교 제1회로 졸업하고, 모교에서 다년간 교편을 잡은 김경희(金敬喜)는 일찍 기독교를 받아들이고 개화한 집안에서 1889년에 태어나 평생을 독신으로 조국과 민족을 위해 활약한 여성 애국 투사이다. 숭의여학교 교사로 재직한 그는 학생들에게 지식과 더불어 민족정신을 일깨우는 교육에 주력하였다. 1913년 같이 근무하던 숭의여학교 교사 황에스터와 이들의 동창이며 교회의 중진인 안정석 등 3명이 중심이 되어 항일비밀단체인 ‘송죽회(松竹會, 일명 송죽결사대)’를 조직하고 제1대 회장을 역임하였다. 

    애국정신이 투철한 김경희는 송죽회를 이끌면서 3·1 운동까지 정예학생인 박현숙·이효덕·황신덕 등 20여 명을 모아 독립사상을 고취하는 집회를 열었고, 망명 지사의 가족 돕기, 군자금 모금 등 활발한 활동을 벌였다. 3·1 운동 후에는 국내와 상해를 오가며 독립운동에 온갖 정성을 쏟았으나, 잇단 고문과 폐 질환으로 몸이 쇠약해져 1920년 32세의 꽃다운 나이에 숨을 거뒀다.

  • 최형록
    최형록

    최형록

    독립운동의 선봉, 최형록 (崔亨祿, 1895~1968)

    숭의여학교 2회 졸업생인 최형록은 1885년 평양에서 태어나 1910년 숭의여학교를 졸업하고, 1910년 상해로 망명하여 1914년 신규식 선생이 세운 상해의 박달학원(博達學院)을 수료하면서 민족의식을 키워나갔다.

    1918년 스물세 살 때 독립운동가 조소앙 선생과 결혼하면서 본격적으로 독립운동계에 두각을 나타내었다. 1940년 최형록 애국지사는 한국여성동맹회를 조직하여 감찰위원으로 활동하는 한편 1943년에는 권기옥, 김순애, 방순이, 최선화, 최애림 등과 충칭 임시정부 산하에 대한민국 애국부인회를 조직하여 간부로 활동하였다. 한편, 그는 1940년 5월 중경에서 한국국민당·재건한국독립당·조선혁명당 등 3당이 통합하여 결성된 한국독립당에 가입하여 여성당원으로서 독립운동의 일선에서 활약하였다. 또 1943년 12월 임시정부 외무부 총무과 과원으로 선임되어 남편과 함께 임시정부의 외교활동을 전개하였다. 정부는 최형록 애국지사에게 1989년에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했다.